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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지붕 두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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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지붕 두 아내

섹시 0 188 2021.03.30 00:46

이 글의 내용은 저의 앞 번 글인 한 지붕 두 남편이란 글을 읽으신 독자께서 역으로 한 번 쓰면 어떻겠냐고 하셔서 쓴 글임을 사전에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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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나보다 복이 많은 놈이 있다면 나와 보라.

물론 예전에는 나보다 더 복이 많은 남자들이 수 두록하게 많았던 것으로 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14명을 거느렸던 성종이 있었고 11명을 거느렸던 태종이 계셨으며 세종대왕께서도 9명을 거느렸는데 이건 조선시대에 국한한 것이지만 고려로 거슬러 올라가면 태고 왕건의 경우 왕비만 6명이고 부인은 무려 23명이나 거느렸다고 합니다.또 모 언론인의 경우 밤의 황제라는 별명을 가졌고 머리를 얹어준 기생의 숫자는 감히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라는 말이 전하면 못 먹고 못 입으며 못 살던 5공 초기만 하더라도 임이라도 하나 중일 요량으로 딸을 첩으로 보내었기에 부자들의 경우 여러 명의 첩을 거느렸지만 축첩을 금지하기 시작하자 우리나라에서 첩은 사라졌습니다.

말 그대로 일부일처제가 실시가 되었고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당당하게 첩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그도 나이어린 처제를 말입니다.

그럼 이제부터 그 사연을 적나라하게 밝히겠습니다.



내 나이 금년 35살로 중소기업에서 대리로 근무를 하고 있으며 아내는 31살이며 나는 일반 대학을 졸업한 반면 마누라는 간호대학을 졸업하여 간호사 국가고시 시험을 패스하고 지금도 종합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를 하고 있다.



내가 마누라를 만나게 된 것도 병원에서였다.

아버지가 위암으로 수술을 받은 병원이 바로 아내가 근무하는 병원이었고 수술 후 입원한 병동이 아내가 근무를 하는 병동이었다.

엄마가 계시지만 당시 학교에 다니는 동생들이 있었기에 집을 비울 수가 없었기에 일요일이나 공휴일에는 엄마가 간병을 하였지만 주중의 낮에는 간병인을 두고 썼지만 밤에는 내가 아버지의 병수발을 들어드렸다.

낮에는 입사한지 얼마 되지 않은 직장에서 업무를 배우고 상사들의 눈치를 살피다가 밤이면 병원에서 거의 잠을 자지 않고 수발을 들다보니 나의 건강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일요일 날 어머니가 병원에 가셔서 수발을 들던 중에 간호사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 간호사가 나중에 내 아내가 된 간호사였는데 내 사정을 엄마로부터 듣고는 일주일이면 한두 번 정도 영양제가 든 링거를 무료로 주사 해 주었고 그게 인연이 되어서 아버지가 퇴원을 하시고 나서부터 데이트를 하게 된 것이다.



데이트는 주간 근무를 하는 날과 비번인 날 그리고 주말에만 이루어졌다.

데이트를 하면서 술도 함께 마셨고 술을 핑계로 여관에 가자고 하기만 하면 헤어지자고 하는 바람에 결혼 전까지 진척인 된 것이라고는 고작 손을 잡거나 팔짱을 끼거나 거기서 거기였고 제일 진척이 된 것이라고 하여 봤자 이마나 볼에 뽀뽀를 하는 것이 전부였다.

교회나 성당에 다니지 안하면서도 정신은 청교도 정신을 가지고 있어서 섹스는 결혼을 하고 나서나 이루어지면 그도 종족 보존 차원에서 하는 행위로 알고 있었다.

아내가 그런 정신을 가지고 있게 된 이유가 있었다.



그건 돌아가신 장인어른의 행동이 그녀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만들어버린 것이다.

나중에 안 이야기지만 장인어른은 말 그대로 한량이었다고 하였다.

시골에서 사시던 장인어른은 선대로부터 엄청나게 많은 전답과 산을 상속받았고 전답 모조리 소작을 주었고 그 관리도 직접 하지 않고 마름을 두어 관리를 하였는데 소작료가 들어오게 되면 그 돈을 가지고 집을 나가서는 가지고 간 돈이 떨어져야 다시 집으로 오는 생활을 하셨다는 것이다.

결국 기생집이나 아니면 돈이 궁한 여자들에게 생활비를 주어가며 소실 노릇을 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런 소실이 한두 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숫자는 누구도 몰랐는데 돌아가시자 소복을 입고 찾아와 장인어른 영정 앞에서 통곡을 한 여자가 무려 여덟 명이나 되더라는 것이었다.

거기다가 아이들까지 동반을 하여 온 여자들도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장모님의 마음씨는 너무나 고와서 남편이 죽자 소복을 입고 와서는 함께 장례를 치른 여덟 명의 남편 소실들에게 구박을 하기는커녕 되레 장례를 치르고 갈 때 한 사람 앞에 논과 밭을 각각 한 마지기씩 주어서 주변 사람들로부터 칭찬이 자자하였고 그 이야기는 지금도 내가 처갓집에 가기만 하면 처갓집 주변에 사는 사람들로부터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수도 없이 들어온 사실이다.



아내가 대학에 다닐 때의 일이었다고 한 이야기를 하나 하고 너머 가겠다.

대학 일학년 여름방학 때 시골로 내려갔더니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어린아이가 하나 있었고 아내의 아버지 즉 나로서는 얼굴도 뵙지는 못 하였지만 장인어른께서 딸인 내 아내에게 걔를 보고 언니라고 부르라고 하더라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평소 바람기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밖에서 난 아이를 집으로 들일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던 아내 입장에서는 어이가 없는 일이었지만 엄마도 걔를 딸처럼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에 더욱 놀라 엄마에게 자초지종을 물은 결과 걔 엄마도 아버지의 소실이었고 걔는 아버지의 씨가 맞았다.

그런데 걔 엄마가 갑자기 죽어버리자 걔 엄마의 친정으로부터 첩 질을 한다며 인연이 끊긴 바람에 걔는 졸지에 고아가 되었고 의탁을 할 곳이 없게 되자 부득불 아버지가 걔를 집으로 데리고 왔다는 것이었다.

그 정도로 아내의 아버지 즉 얼굴도 뵙지 못 한 장인어른은 여복이 많아도 너무 많아 장모님과 아들딸에게는 골치 아픈 그런 분이셨다.

그런 장인어른을 장모님께서는 자신의 팔자로 돌리고 사시면서 그래도 한 지붕 밑에 측실을 두지 않은 것만으로 감사해 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런 아버지를 두었기에 아내가 된 여자는 남자가 아무 곳에서나 여자와 붙어먹고 찍찍 싸서 씨를 뿌리는 짓을 보지 못 하였고 남자는 오로지 한 여자와 관계를 하되 그도 종족 보존차원 이외로의 섹스는 천박한 짓으로만 생각하였다.

그런 여자를 결혼 전에 어떻게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 할 일이었기에 난 결혼 이전에의 잠자리는 아예 포기를 한 상태였다.



아내는 대학에 다니면서 원룸아파트에서 자취를 하였고 종합병원 간호사로 근무를 하면서는 앞에서 언급을 한 아버지의 소실이었다가 엄마가 죽어버리자 아내의 엄마 즉 장모님이 거두어 키우던 아이를 데리고 와서 친동생처럼 키우면서 학교에 보냈기에 데이트도 길게 하지 못 한 것은 물론이고 야심한 밤에는 더더욱 곤란해 하였기에 오후 7시가 넘으면 안절부절 못하여 내가 더 피곤하져서 원룸아파트까지 데려다 주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그러다가 아내가 차나 한잔 마시고 가라고 할 경우 원룸아파트에 들어가면 당시 중학교 이학년 밖에 안 되던 걔는 결혼도 하지 않은 상태인대도 나더러 형부라고 부르며 따랐다.

아내의 말에 의하면 공부에는 관심이 없지만 마음씨는 착하고 말을 잘 듣는다는 것이었다.

거기에다 내가 보기에는 붙임성도 좋았다.

아내가 사는 원룸아파트에 자주 드나들면서 본 결과 아내의 말대로 공부에는 관심이 없지만 굳이 학교에 다니는 이유는 언니인 아내의 말대로 아무리 공부에 관심이 없더라도 고등학교 졸업장을 있어야 한다는 말에 마지 못 해 학교에 다닌다고 마치 자랑이라도 하듯이 나에게 말하여 아내가 걔 머리를 쥐어박으며 웃엇고 걔도 그게 무슨 재미가 있은 일이라고 배를 잡고 웃는 통에 나도 웃어야 하였다.



또 결혼 이야기가 오고가면서 상견례를 하게 되었는데 고지식한 우리 아버지께서는 연로하시다 하지만 안사돈을 모시고 상견례를 하는 것이 도의적으로 옳은 일이라고 하시는 바람에 연로하신 장모님 건강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 가족 전부가 아내의 시골집으로 가서 상견례를 하여야 하였다.



아버지가 병원에서 퇴원을 하고부터 시작이 된 데이트는 일 년을 줄다리기를 한 끝에 나와 그 여자는 결혼을 하게 되었고 부부가 되었다.

결혼을 하고 제일 먼저 난관에 부착을 한 것은 아내가 종합병원에 근무를 하면서 친언니 이상으로 따르던 아버지의 소실 딸인 아내의 이복동생 영아 문제였다.

아내의 이복동생을 결혼과 함께 시골로 내려 보내기로 하였으나 문제는 영아가 죽으면 죽었지 내려가지 않겠다고 버틴 것이다.

결혼을 하기 전에 아내는 나에게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었다.

묻는 자체가 데리고 있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을 익히 잘 알고 있었고 또 처갓집에서 아내가 가지고 있던 원룸아파트를 처분하고 일반 아파트를 살림집으로 사준 마당에 데리고 있지 못 하겠다는 것도 어불성설이라 마지 못 해 데리고 있기로 하였다.



00군 00면에 사는 사람치고 작고하신 장인어른의 땅을 밟지 않고서 사는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이며 지금도 큰 처남이 그 많은 전답을 마름을 통하여 관리를 하고 있는데 큰 처남도 장모님을 닮아서인지 몰라도 천성이 착하여 그 많은 전답을 공평하게 형제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내 아내도 제법 많은 전답을 소유하고 있지만 그 전답을 팔지는 못 하고 소작료를 받고 있다.



큰 처남이 형제들에게 나누어 준 전답은 소유는 형제들 각각에게 있지만 절대 매매를 할 수가 없도록 등기를 할 때 다른 형제들에게 돈을 빌린 것처럼 하여 저당을 잡혔기에 매매를 할 수가 없으며 다른 형지들의 전답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해두었기에 남의 손에 넘어 갈 일은 없게 만들어 두었다.



그래서 가을 수확 철이면 쌀과 콩 같은 양곡과 과일에 거금의 현금까지 아내의 통장으로 착실하게 지금도 입금이 되고 있으며 그 돈만으로도 풍족하게 살 수가 있을 것이지만 아내는 간호사 일을 아무 불평불만 없이 수행하고 있기에 나도 마누라에게 뭐라고 할 수도 없는 그런 입장이다.

그런데 장인어른의 소실에서 난 애들 중에 유일하게 영아는 아내처럼 약간의 전답을 상속 받았다.

장인어른께서 살아계실 때 영아를 자신의 호적에 입적을 시켰기에 영아에게도 지분이 있었고 마음씨 고운 큰 처남과 아내의 형제들은 영아를 동기간으로 인정하고 상속하는데 반대를 하지 않았기에 상속을 받은 전답이 있었기에 그 전답에서 나오는 돈을 생활비로 꼬박꼬박 아내에게 주었고 또 가을 수확 철이면 영아에게도 쌀과 콩 같은 양곡과 과일 등에 약간의 현금까지 입금이 되었기에 영아를 무시 할 수가 없었던 것이고 비록 장인어른의 소실 딸이지만 혹이 아니라 복덩어리나 마찬가지였기에 거두자고 하였던 것이다.



아내는 영아 목으로 들어온 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영아 이름으로 저축을 했고 양곡과 과일 등이 오면 그것을 아파트단지에 사는 사람들에게 산지 가격으로 팔아서 그 돈도 저축을 하였기에 열 살부터 저축을 한 돈의 금액이 15살의 중학생 돈답지 않게 거금이 저축이 되어있었다.

어쩌면 그 많은 돈이 영아에게 공부에 대한 열의를 식게 만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간혹 있다.

이유는 영아가 시집을 갈 나이가 되면 적어도 억이 훨씬 넘는 재산을 가지게 될 것인데 구태여 공부를 열심히 하려고 머리를 싸맬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아내와 나의 결혼 생활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나에게는 아내에 대한 불만이 아주 많다.

인간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아니 동물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본능이 있고 그 본능에 맞추어 살아가게 마련이 아닌가.

동물적 본능이라 함은 성에 대하여 빼고 나면 남는 것이 거의 없을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종족 보존이라는 아주 중요한 역사적인 사명도 함께하는 것은 맞는 말이다.

종족 보존 앞에는 성적인 본능이 우선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아내의 생각은 나와 판이하게 다르다.

남녀의 섹스는 종족 보존 왜에는 다른 것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내가 아내와 섹스를 할 수 있을 때는 배란기 말고는 없는 것이다.

사람 특히 남자는 성적인 만족을 얻고 싶어 할 경우가 아주 많다.

그래서 평소 아내에게 한 번 하자고 사정을 하면 아내는 나를 마치 무슨 더러운 동물을 대하듯이 하는 것이다

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그러면서도 살아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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